소피아(Sophia)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으며,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었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트랄데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로서
성당을 건축한 5년동안 연인원 10,000명의 노동자가 공사에 동원되어
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성당의 높이는 약 57m로서 Dome은 납판을 깔고
벽돌을 쌓아 만든 Dome으로 그 직경이 30m가 넘어
당시의 기술로서는 상상을 초월한것이었다.
성당 내부에 4개의 아취형 기둥을 세워 이 거대한 Dome을 지탱하고 있다.
이 건물을 완성 시켜놓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기었도다,
솔로몬이 이룩하지 못한것을 짐이 완성했도다“ 라고 말하였다한다.
소피아 대성당은 당대 기독교의 총본산이며
비잔틴 건축양식의 총집합이라 할수있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때 사원의 내부는 쑥밭으로 변했고
이후 이스람의 모스크로 개조되어 477년간 회교사원으로 쓰이다가
박물관으로 변신하여 현재에 이르고있다.
소피아 대성당은 외모의 웅장함과 장중함에 비하여 그 내부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참 고>
15세기경의 이스탄불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접경지대인 동시에 기독교 중심부이기도 했다.
당시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플로 불렸으며 1000년간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투르크족은 몇 세기에 걸쳐 서쪽으로 영역을 넓혀
드디어 비잔틴제국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비잔틴제국은 투르크 해군을 막으려고
바다에 장애물을 설치했고 육지에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묘한 전략을 짜 냈다.
기름을 두른 판과 통나무를 이용해 엉뚱한 곳에서 배 72척을 산으로 끌어올린 후,
갑자기 비잔틴제국 영토 안의 바다인 금각만(Golden Horn·할리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453년 5월 29일 비잔틴제국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수도의 이름은 이스탄불로 바뀐다.
하지만 기독교 문명이 말살된 것은 아니었다.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는 잘 융합되어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고,
역사학자 토인비가 언급한 것처럼 ‘인류문명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됐다.
거대한 야외박물관을 돌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성 소피아 사원을 중심으로 반경 약 1㎞ 안에 수많은 유적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사원은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라고 부르는데,
하기아는 ‘성스럽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다.
서기 537년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사원을 만든 후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능가했노라”라고 외쳤을 정도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이것을 허물지 않고
내부에 ‘미흐라브’(메카를 향한 벽감)를 만들어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했다.